어떤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는 순간은 대체로 그 문제에 이름을 붙인 뒤였다. 이름이 흐릿할 때는 손을 어디에 대야 할지조차 몰랐는데, 이름이 또렷해지면 최소한 다음에 할 일이 보였다.
다만 처음에 나는 이걸 조금 과하게 믿었던 것 같다. 통제되지 않는 것은 정의되지 않은 것이다. 한동안 이렇게 적어두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 문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통제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정보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자원이나 권한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상대가 독립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서일 수도 있고, 애초에 확률적인 문제라서일 수도 있으며, 몸과 신경계가 의식의 명령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실업, 질병, 타인의 평가, 시장 상황은 아무리 정확하게 정의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정의를 붙이면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지가 분명해진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렇게 고쳐 적는다.
통제란 상황을 내 뜻대로 바꾸는 일이라기보다, 지금 손댈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아는 일에 가깝다.
이 글은 그 손댈 지점을 찾으려고 내가 붙여둔 이름들의 목록이다. 선택, 감정, 태도, 계획, 그리고 방향. 하나 미리 적어두면, 아래의 이름들은 결론이 아니라 임시 가설이다. 현실과 어긋나면 고칠 생각으로 적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에 대하여
공자는 정치를 맡으면 무엇부터 하겠냐는 물음에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부터 하겠다고 답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 『논어』 자로(子路)편 3장
감정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읽히는 문장이 있다.
정념인 감정은, 그것에 대해 명석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즉시 정념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5부 정리 3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인용들은 내 생각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말한 ‘명석판명한 관념’은 그의 형이상학 전체와 맞물린 개념이라,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는 내 생활 습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래의 인용들도 대체로 그렇다. 근거라기보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표현들에 가깝다. 그 전제 위에서 읽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서 ‘정의’라고 부르는 것들의 층위
한 가지 더 정리해두고 싶은 게 있다. 예전에 나는 아래의 것들을 전부 ‘정의’라고 불렀는데, 사실 성격이 서로 다른 작업들이 섞여 있었다. 개인적인 판단을 객관적인 사실처럼 적어두면, 나중에 그 문장에 스스로 갇히게 되더라.
| 층위 | 성격 | 이 글에서의 예 | 무엇으로 검증되나 |
|---|---|---|---|
| 개념 구분 | 서로 다른 것을 갈라 부르는 일 | 착취·거래·협력·성장 관계 | 실제 사례에 잘 들어맞는가 |
| 진단 가설 | 지금 내 상태에 대한 잠정적 해석 | 이 우울감에는 무가치감이 섞여 있는 것 같다 | 그 해석을 따라 해봤을 때 나아지는가 |
| 행동 원칙 | 반복되는 상황에서의 내 선택 규칙 | 과정의 선택권이 없는 자리는 피한다 | 나중에 후회가 줄었는가 |
| 가치 방향 | 옳고 그름에 대한 내 지향 | 공존공영을 이상으로 둔다 | 증명되지 않음. 선택하는 것 |
아래 다섯 개도 각각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 표시해두었다.
행동 원칙 — 과정의 선택권이 없는 자리는 피한다
처음에 나는 이 원칙을 이렇게 적었다. "결과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지는 자리, 그러니까 막힌 선택지는 피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너무 넓었다.
현실에서 중요한 선택지는 대부분 결과의 통제권이 없다. 취업 지원, 창업, 연애, 협업, 작품 발표, 투자, 시험, 설득과 협상 — 전부 결과가 바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자리들은 동시에 가장 많이 배우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결과가 내 손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선택지를 막힌 것이라 부르면, 불확실하지만 해볼 만한 도전까지 전부 피하게 된다.
그래서 기준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옮겼다. 요즘은 이렇게 묻는다.
- 과정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 결과와 무관하게 기술·경험·관계·정보가 남는가
- 실패했을 때 다음 선택지로 옮겨갈 수 있는가
- 상대가 규칙을 임의로 바꾸는가
- 투입과 보상 사이에 최소한의 설명 가능성이 있는가
고쳐 쓴 원칙은 이렇다. 과정의 선택권이 없고, 결과와 무관하게 남는 학습이나 자산도 없으며, 이탈 가능성까지 제한된 자리는 피한다. 결과가 불확실한 것과,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있고,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판단, 충동, 욕구, 회피 — 요컨대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장
이 문장을 오래 "결과가 바깥에 있는 자리를 피하라"는 뜻으로 읽었는데, 다시 보니 그쪽은 아닌 것 같다. 에픽테토스가 말한 쪽은 오히려 외부 결과에 내 행복과 사람됨을 걸지 말라는 데 가깝다. 그러면 결과가 바깥에 있어도 그 안에서 할 일은 남는다. 예전에 결과를 기다리는 자세를 그만두기로 했던 저녁에 적은 것도, 지금 다시 읽으면 ‘결과가 외부에 있는 자리를 떠난다’기보다 ‘결과만 기다리며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 자리를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개념 구분 — 착취, 거래, 협력, 그리고 성장 관계
한동안 나는 관계를 ‘이용’과 ‘활용’ 둘로 나눠서 봤다. 이용은 상대의 현재 능력을 가치가 다할 때까지 쓰는 것이고, 활용은 잠재력을 이끌어내 성장을 장려하면서 나도 그 수혜를 입는 것이라고 적었다.
지금은 이 이분법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내 성장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착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가 직원의 모든 잠재력을 개발해줄 의무까지 지는 건 아니고, 정해진 일과 대가가 공정하게 교환되며 거절권과 이탈권이 남아 있다면, 다소 도구적이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착취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래서 두 갈래 대신 층위로 본다.
| 층위 | 무엇이 오가나 | 상대의 비용은 | 내 판단 |
|---|---|---|---|
| 착취 | 한쪽의 비용을 무시한 채 이익만 취함 | 계산에 들어가지 않음 | 떠나는 쪽이 낫다 |
| 거래 | 합의된 가치와 대가를 교환함 | 값으로 반영됨 | 문제 없음. 대부분의 관계 |
| 협력 |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의 능력을 씀 | 함께 나눠 짊 | 좋은 자리 |
| 성장 관계 | 서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키움 | 서로 감수함 | 드물고 귀함 |
예전 글에서 내가 ‘이용’이라고 부른 것은 사실 맨 위 칸, 착취였다. 그리고 ‘활용’이라고 부른 것은 맨 아래 칸이었다. 그 사이의 두 칸 — 공정한 거래와 협력 — 을 빼먹으면, 평범하지만 멀쩡한 관계까지 부정적으로 읽게 된다. 사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대부분은 가운데 두 칸에 있고, 그건 아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든,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제2장
이 문장에서 내가 중요하게 보는 건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가 아니라 "한낱 수단으로만" 이라는 단서다. 서로의 능력을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수단으로만 남을 때가 문제다. 위 표에서 착취와 거래를 가르는 선도 결국 여기라고 본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그를 더 나쁘게 만들지만,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대하면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데려가게 된다.
—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8권 4장
좋아하는 문장인데, 여기에는 단서를 붙여두려고 한다. "네가 더 나아질 수 있으니 그렇게 대한다"는 말은 격려일 수도 있지만, 내가 정한 가능성을 상대에게 얹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을 내가 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성장이 상대가 원하는 것인지 먼저 물어보는 절차가 빠지면, 이건 응원이 아니라 투사에 가까워진다. 나도 그렇게 굴었던 적이 있다.
진단 가설 — 우울, 불안, 공포에 대한 내 해석
여기서부터는 정의가 아니라 가설이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아래는 의학적 정의가 아니고, 내 상태를 설명해보려고 내가 세워둔 임시 모델이다.
우울감 — "가치가 없다"가 아니라 "가치를 느끼기 어렵다"
한동안 나는 이렇게 적었다. "우울은 스스로에게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그러니 생산적인 활동으로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무기력하고 자기효능감이 떨어진 날에는 이 해석이 실제로 도움이 됐다. 작은 일 하나를 끝내고 나면 확실히 나아졌다. 그런데 이 문장을 계속 붙들고 있으니 곤란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우울해서 아무것도 만들지 못함 → 만들지 못했으니 가치가 없음 → 더 우울해짐
가치와 생산성을 붙여두면 이런 순환이 생긴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못 만든 날의 나는 값이 떨어진 사람이 된다. 성취로 자신을 지탱해온 사람일수록 이 고리에 잘 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울감의 양상도 하나가 아니었다. 흥미와 즐거움이 사라지는 날, 잠과 식욕이 흔들리는 날, 몸이 무겁고 생각이 느려지는 날, 집중이 안 되는 날, 죄책감이 올라오는 날, 상실을 아직 못 보낸 날이 각각 다르다. 여기에 신체 질환이나 오래 쌓인 스트레스가 얹히기도 한다. 이걸 전부 ‘자기 가치의 결핍’으로 묶으면, 정작 필요한 게 휴식이나 치료인 날에도 나를 더 몰아붙이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고쳐 적는다.
지금의 우울감에는 무가치감, 무기력, 흥미 상실, 고립감 같은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무엇이 두드러지는지 먼저 살피고, 가능하면 작은 활동·휴식·관계·도움을 통해 회복의 조건을 만든다.
핵심은 "나는 가치가 없으니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금은 내가 가진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상태일 수 있다" 쪽이다. 활동은 가치를 새로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가치를 다시 느끼게 도와주는 수단에 가깝다고 본다. 예전에 작은 순간에 가치를 담는 일에 대해 적었던 것도 그런 뜻으로 다시 읽고 싶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잘 되지 않는 날이 길게 이어진다면, 그건 더 몰아붙일 때가 아니라 도움을 구할 때라고 생각한다.
불안과 공포 — 대상의 유무보다는, 분해할 수 있는가
전통적인 구분은 이렇다.
불안(Angst)은 기대와 뚜렷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은 불확정적이고 대상이 없다는 성질을 갖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대상을 찾았을 때는 ‘불안’ 대신 ‘공포(Furcht)’라는 말을 쓴다.
— 프로이트, 『억압, 증상, 불안』(1926), 표준판 20권 보론 B (해당 대목을 인용한 논문)
불안은 무언가 확정된 것을 가리키는 공포 및 그와 비슷한 개념들과는 전혀 다르다.
—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1844)
개념으로는 선명한데, 실제 경험에서는 경계가 그렇게 깔끔하지 않았다. "취업이 불안하다"는 대상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불안이라고 부른다. 두려움이 소득, 자존감, 타인의 평가, 미래 전망으로 퍼져 있어서 하나의 대상으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먼저 각성하고 생각이 뒤늦게 이유를 지어내는 날도 있고, 대상을 자꾸 구체화할수록 오히려 반추가 심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불안을 공포로 바꾼다"는 표현 대신 이렇게 적는다. 막연한 불안을 구체적인 우려와 대응 가능한 과제로 분해한다. 그리고 순서를 이렇게 바꿨다.
- 지금 불안하다. — 상태를 인정한다. 여기까지는 판단하지 않는다.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람·사건·시점까지 넣어 적어본다. 여러 개면 여러 개로 둔다.
-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내 추측인가. — 이 줄이 없으면, 잘못된 전제 위에 아주 성실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과 그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 상상 속 최악과 실제 확률을 따로 적는다.
-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
- 혹시 지금은 행동보다 진정과 휴식이 먼저인가.
3번과 4번은 나중에 넣은 줄이다. 예전 순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사실이라고 전제한 채 곧장 대응으로 넘어갔는데, 그러면 추측을 사실로 굳혀놓고 계획만 정교해지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6번도 늦게 넣었다. 모든 감정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걸 자주 잊었기 때문이다. 어떤 슬픔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충분히 겪어야 하는 감정이고, 어떤 불안은 대상을 찾기 전에 몸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이며, 어떤 분노는 계획보다 경계를 세우는 일이 먼저다. 감정은 상실을 애도하게 하고, 경계가 침범되었음을 알리고, 중요한 욕구를 드러내고, 쉬어야 한다는 신호를 준다. 이름 붙이기는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쓸 수 있다.
그래서 요즘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 감정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가 아니라 "이 감정은 무엇을 알려주고 있고, 지금 필요한 건 해결·수용·표현·휴식 중 무엇인가" 쪽이다.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해해야 할 뿐이다. 더 많이 이해하면 그만큼 덜 두려워하게 된다.
— 마리 퀴리로 널리 인용되는 말. 다만 퀴리 본인의 저술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문헌상 확인 가능한 최초 출처는 1973년 멜빈 베나드의 저서에 인용된 형태다.
출처가 흐릿한 인용을 굳이 남기는 이유는, 이 글이 이름을 정확히 붙이는 일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문장일수록 출처를 정확히 적어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태도 — 자리마다 달라지고, 대개는 훈련으로 갖춰진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다만 모든 자리에 맞는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어떤 순간에는 정확하고 꼼꼼한 태도가 필요하다. 숫자 하나가 어긋나면 그 뒤가 전부 어긋나는 일 앞에서 "잘 될 거예요"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필요한 건 낙관이 아니라 한 번 더 확인하는 손이다.
또 어떤 순간에는 두렵더라도 의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내 표정을 보고 있을 때가 그렇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목적으로, 마땅한 방식으로 그러한 것 — 그것이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것이 덕에 속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6장 (1106b)
그래서 태도에 대한 내 원칙은 좋은 태도 하나를 갖추는 일이 아니라, 여러 태도를 갖춰두고 그 자리가 요구하는 것을 꺼내 쓰는 일이다. 낙관도, 꼼꼼함도, 의연함도 각각 제 자리가 있다.
다만 여기에 두 가지 단서를 붙여둔다.
첫째, 태도는 옷장에서 옷을 고르듯 즉시 선택되지 않는다. 태도는 성격, 습관, 지난 경험, 그날의 몸 상태, 그 관계가 얼마나 안전한지에 함께 얹혀 있다. "지금은 의연해야 하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하지"라는 문장은 태도를 고르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자책이 되기 쉽다. 같은 책의 앞부분이 오히려 이 대목에 맞는 것 같다.
도덕적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그래서 그 이름도 ‘습관’이라는 말에서 조금 변형되어 얻어진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1장 (1103a)
태도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 미리 길러두는 것에 가깝고, 그래서 지금 꺼내지지 않는다면 아직 덜 길러진 것이지 내가 못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둘째, 의연함은 감정을 숨기는 것과 다르다. 예전에 나는 "불안을 그대로 내보이는 건 무게를 옮겨 얹는 일"이라고 적었는데, 지금은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책임을 진 사람이 불안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 옆 사람은 상황을 가볍게 오판하거나 그 사람이 혼자 다 감당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중요한 건 숨기느냐 드러내느냐가 아니라 가공해서 전달하느냐였다.
"저도 이 상황이 걱정됩니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위험은 이것이고, 다음에 할 조치는 이것입니다."
이건 불안을 떠넘기는 것도 아니고 없는 척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 내가 연습하는 형태는 이쪽이다.
용기란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고 두려움의 통제이지,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다.
— 마크 트웨인, 『푸든헤드 윌슨의 비극』(1894) 12장 서두의 달력 경구
계획 — 의지를 대신하진 않지만, 의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처음에 나는 계획을 이렇게 적었다. "계획은 이미 의지가 있는 사람이 원래도 이룰 수 있었을 것을 더 빨리 이루게 해주는 도구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계획이 없어도 결국 원하던 자리에 닿는다."
앞 문장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뒤 문장은 사실과 다른 것 같다. 의지가 강해도 무너지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목표가 지나치게 크거나 모호할 때, 실행 환경이 나쁠 때, 피드백이 없을 때, 주의력에 부담이 클 때, 잠과 건강이 무너졌을 때, 일정이 과밀할 때. 반대로 의지가 그리 강하지 않아도 환경이 좋고 시작 단위가 작으면 그럭저럭 굴러가는 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계획의 기능을 다시 적어보면 이렇다.
- 기억을 대신해준다
- 매번 다시 결정하지 않게 해서 결정 피로를 줄여준다
- 시작 장벽을 낮춘다
- 그날의 기분에 따라 행동이 흔들리는 폭을 줄여준다
- 무엇이 어긋났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 의지가 약한 날에도 최소한의 행동은 남겨준다
그러니까 계획은 목적과 동기를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의지가 매일 같은 세기로 유지되지 않아도 행동이 이어지도록 돕는다. 의지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의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주는 쪽이다.
어느 항구로 가려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서한』 71번
자신의 삶에 ‘왜’가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어떻게’를 견뎌낸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12
니체의 문장은 힘이 세지만, 여기에도 단서를 붙이고 싶다. 이유가 충분해도 방법이 나쁘면 무너진다. 의미만으로 수면 부족, 과중한 업무, 비현실적인 일정, 구조적인 제약을 계속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계획이 자꾸 무너질 때 나는 이제 세 가지를 함께 묻는다. 부족한 것이 방법인가, 이유인가, 아니면 환경인가. 예전에는 앞의 둘만 물었는데, 실제로는 세 번째가 원인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유가 흐릿한 자리라면 결과가 아니라 문제를 중심에 두는 자리로 한 번 돌아가고, 환경이 문제라면 계획표보다 환경을 먼저 고치는 편이 빨랐다.
가치 방향 — 이상에 두되, 합리화와 재조정을 구분한다
방향과 방법은 나눠서 본다. 방법은 현실적이어야 하고, 방향은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향까지 현실에 맞춰 잡으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속으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상황을 만났을 때 그것을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정리하며 넘어가게 된다. 그 순간에는 마음이 편해지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납득하지 못한 채 납득한 척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한 번 스스로를 속이면 다음에는 조금 더 쉬워지고, 그 간극은 대체로 나중에 무거워져 돌아왔다.
다만 여기서 반드시 갈라둬야 할 것이 있다. 현실에 맞춰 방향을 손보는 일이 전부 자기기만은 아니다.
| 구분 |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 나중에 남는 것 |
|---|---|---|
| 합리화 | 사실을 비틀어 나를 보호함 | 덮어둔 만큼의 무게 |
| 수용 | 바꿀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함 | 쓸데없는 소모가 줄어듦 |
| 재조정 | 가치와 현실을 함께 놓고 목표를 고침 | 더 오래 갈 수 있는 계획 |
가진 자원에 맞게 목표를 바꾸거나,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받아들이거나, 우선순위를 다시 매기는 일은 성숙한 조정에 가깝다. 나는 이 셋을 자꾸 뭉뚱그렸고, 그래서 필요한 재조정까지 배신처럼 느꼈던 것 같다.
이상을 세워두면 같은 상황이 다르게 읽힌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일" 이 된다. 다만 이 해석에도 조건이 붙는다. 지금의 불완전한 진전을 인정할 것, 이상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낮게 보지 않을 것, 이상을 위해 나와 남을 소모하지 않을 것, 그리고 이상이 현실 검증을 거부하는 면허가 되지 않을 것. 이 조건이 빠지면 이상은 방향이 아니라 만성적인 결핍감이 된다.
아, 그러나 사람이 닿으려는 곳은 손에 쥘 수 있는 것보다 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늘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 로버트 브라우닝, 「안드레아 델 사르토」(1855)
그렇다면 어떤 이상을 바라볼 것인가
여기서 자주 언급되는 세 단어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다만 먼저 밝혀둘 것이 있는데, 적자생존·약육강식·공존공영은 같은 층위의 후보가 아니다.
- 적자생존은 진화 현상에 대한 서술이다.
- 약육강식은 자연이나 사회를 읽는 하나의 해석이다.
- 공존공영은 윤리적·정치적 지향이다.
이 셋을 나란히 놓고 "무엇을 방향으로 삼을까" 묻는 건 사실 공정한 비교가 아니다. 앞의 둘은 애초에 방향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짚을 것만 짚고, 비교는 다른 축으로 옮기려 한다.
적자생존은 오해가 많은 말이다. 이 표현은 다윈이 아니라 허버트 스펜서가 만들었고, 다윈은 『종의 기원』 5판(1869)에서 이를 받아들여 썼다(Survival of the fittest). 원래 뜻도 ‘가장 강한 것이 이긴다’가 아니라 ‘그 환경에 가장 잘 맞는 것이 남는다’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건 서술이지 당위가 아니다. 무엇이 남았는지를 설명할 뿐,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약육강식은 서술을 넘어 정당화까지 간 경우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정의라는 것은 힘이 대등한 사이에서나 문제가 되고,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할 일을 당한다.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권 89절, 멜로스 대화
이 말을 한 쪽은 아테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 자신이 시칠리아에서 무너져 같은 논리의 반대편에 섰다. 힘의 논리를 방향으로 삼으면 그 논리는 내가 약해지는 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실제로 고민할 만한 비교는 이 세 가지 질서 쪽이라고 생각한다.
| 질서 | 무엇을 전제하나 | 충돌을 어떻게 다루나 |
|---|---|---|
| 경쟁만을 중심에 둔 질서 | 몫은 정해져 있고 나눠 갖는다 | 이긴 쪽이 가져감 |
| 공정한 경쟁과 협력이 섞인 질서 | 규칙이 있으면 경쟁도 생산적이다 | 규칙과 절차로 조정 |
| 상호부조와 공동성장을 중심에 둔 질서 | 함께 크면 몫도 커질 수 있다 | 관계를 깨지 않는 선에서 조정 |
나는 세 번째를 이상으로 두고, 현실에서는 두 번째 위에서 움직이는 편이다. 그리고 공존공영을 오해 없이 적어두고 싶다.
이건 결과를 똑같이 나누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배의 문제라기보다 성장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서로의 이익이 언제나 일치한다고 가정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리, 예산, 시간, 권한처럼 희소한 것을 두고 이해는 실제로 충돌한다. 그래서 공존공영은 충돌이 없는 세계라기보다, 충돌할 때에도 상대를 파괴하거나 한낱 수단으로만 취급하지 않는 절차를 지키는 쪽에 가깝다고 정의해둔다. 앞에서 적은 관계의 층위로 옮기면, 착취 칸으로 내려가지 않고 거래·협력 칸 위에서 다투는 일에 해당한다.
자연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누가 더 적합한가 — 서로 끊임없이 싸우는 쪽인가, 서로를 돕는 쪽인가. 그러면 상호부조의 습성을 얻은 동물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1902) 1장
흥미로운 건 이 문장이 적자생존을 반박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그대로 쓰면서 결론만 뒤집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성립하는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방향은 도달 가능성으로 고르는 게 아니라 각도로 고르는 것이니, 나는 이쪽을 이상으로 둔다.
그래서 순서를 이렇게 바꿨다
처음에 이 글은 정의 → 통제 → 행동 순서로 쓰였다. 지금은 이렇게 고쳐 쓴다.
- 관찰한다
- 임시로 이름을 붙인다
- 사실과 해석을 나눈다
- 통제할 수 있는 것, 영향만 줄 수 있는 것,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나눈다
- 행동하거나, 쉰다
- 이름을 고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임시로’ 다. 나는 이름 붙이기로 문제를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무엇에 손댈 수 있고 무엇은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분별하려는 것이다. 내가 붙인 이름은 언제든 현실에 맞게 고쳐질 수 있다.
한 가지 더 적어둔다. 이 글은 전반적으로 의지와 성장과 생산성을 높이 사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건 내 성향이고,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려 한다.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 시기에도 가치가 있다. 회복하는 날, 머뭇거리는 날,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 날도 삶의 일부다. 관계도 마찬가지여서, 서로를 성장시키지 않아도 그냥 함께 쉬고 견디고 반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관계가 있다. 모든 관계를 잠재력을 키우는 자리로만 보면, 그런 관계들을 낮게 평가하게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과정의 선택권과 남는 것과 이탈 가능성으로 자리를 판단하고, 관계는 착취·거래·협력·성장의 층위로 보고, 우울감은 무가치감이 섞인 상태일 수 있다고 가정해보고, 불안은 구체적인 우려와 과제로 분해하고, 태도는 미리 길러두고, 계획은 의지에 덜 기대게 만들고, 방향은 이상에 둔다.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상황을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은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지가 조금 분명해진다.
빅터 프랭클을 읽고 적어둔 글에서도 결국 남는 자유는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고르는 일이었다. 태도를 고르려면 먼저 그 상황의 이름을 알아야 하고, 그 이름은 이렇게 적어두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이름은 현실을 완전히 붙잡는 결론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현실에 손을 대기 위해 세우는 임시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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