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을 읽다가 — 관성을 알아차리는 ‘꿈틀대기’

이 글은 완독 후의 정리가 아니다.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원제 Atomic Habits)을 아직 읽는 중인데, 몇 페이지를 넘기다 생각이 자꾸 꿈틀거려서 지금의 나를 붙잡아 적어둔다.

나는 나를 바꾸는 쪽을 택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내가 바뀌는 편이 더 쉽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남을 설득하고 움직이려는 일은 대체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나 자신을 향해 방향을 트는 일은 그래도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래서 바꾸고 싶은 게 생기면 바깥보다 안쪽을 먼저 본다. 그 안쪽을 향한 방법에 나는 ‘꿈틀대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꿈틀대기란, 관성으로 반복하는 비생산적인 행동을 자책 없이 그 순간에 "지금 이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알아차리고, 그와 함께 "지금 내가 바라는 행동은 이것이다"까지 또렷하게 되뇌며, 그 자각을 최대한 여러 번 쌓아가는 일이다. 이미 쌓여버린 행동은 관성이 세서, 더 나은 쪽을 원하면서도 자꾸 그쪽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럴 때 "나는 왜 이 모양이지" 같은 자괴감은 나를 갉아먹기만 하지 관성을 밀어내진 못하더라. 그래서 나는 판단 대신 관찰 두 줄만 붙든다. "지금은 관성 때문에 이 행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는 행동은 ○○이다."

뒷문장이 빠지면 알아차림은 자주 그 자리에서 멈춘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가 비어 있으면, 결국 하던 행동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 자리를 늘 구체적인 한 가지로 채우려 한다. ‘생산적으로 살기’가 아니라 ‘지금은 읽던 문서 한 단락을 마저 읽고 싶다’처럼. 그리고 그 두 줄을 최대한 여러 번 쌓으려 한다.

클리어는 습관을 "자기계발의 복리(複利)"라고 부른다. 한 번의 알아차림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그게 쌓이면 방향이 달라진다는 뜻으로 나는 읽었다. 책을 읽으며 놀란 건, 내가 어렴풋이 하던 이 일이 책의 언어로 꽤 또렷하게 설명된다는 점이었다.

책에 기대어 정리한 ‘꿈틀대기’

먼저 알아차린다. 이 책은 변화의 첫걸음을 ‘행동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철도의 ‘지적확인(가리키며 소리내기)’처럼, 자동으로 흘러가던 행동을 그 순간에 콕 집어 이름 붙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나는 이렇게 한다. "지금, 관성으로 이걸 하고 있다."

자책이 아니라 관찰로 진술한다. "나는 왜 이 모양이지"가 아니라 "이 행동은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이 아니라 사실 한 줄. 자괴감은 관성을 밀어내지 못하고 나만 갉아먹기 때문이다.

바라는 행동을 같이 말한다. 알아차림에서 끝내지 않고 "지금 내가 바라는 행동은 ○○이다." 를 붙인다. 이 책도 습관을 지우는 것보다 같은 자리를 다른 행동으로 바꿔 채우는 쪽을 말한다. 밀어낼 자리에 들어올 것을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비운 자리는 결국 원래 하던 행동이 다시 채우더라.

가장 작은 대체 행동 하나로만 넘어가 본다. 이 책의 ‘2분 규칙’은, 새 습관은 2분 안에 끝낼 수 있을 만큼 작게 시작하라고 말한다. 나도 의식한 직후, 손이 닿는 가장 작은 행동 하나로만 옮겨가 본다. 책을 다 읽는 게 아니라 한 페이지, 정리를 끝내는 게 아니라 창 하나 닫기.

결국 ‘존재’로 귀결시킨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문장은 이것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던지는 한 표다." 목표를 이루려고 의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매번 한 표씩 적립하는 것. 예전에 구르지예프·우파니샤드·에니어그램을 읽고 ‘존재를 바꾸는 것’에 대해 정리했을 때도, 결국 나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

태도가 먼저다

읽는 내내 한 가지 전제가 계속 밑에 깔려 있었다. 습관도, 시스템도, 결국 하루를 제대로 살아내려는 진지한 태도 위에서만 작동한다는 것. 내게 맡겨진 문제를, 내 수준 안에서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보려는 태도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매 순간, 눈앞에 놓인 일에 정확하고 진지하게 마음을 쏟아라. 흐트러짐 없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면서."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지금 눈앞의 일을 진지하게 끝내는 것 — 나는 이 태도가 습관보다 먼저 서 있어야 한다고 본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적어둔 글에서 다뤘듯, 어떤 조건에서도 마지막까지 내게 남는 자유는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고르는 일’이다. 관성이 나를 끌고 가는 순간에도, 내가 고를 수 있는 건 그 순간을 대하는 태도다. 내가 하나의 템플릿에서 굴리는 ‘개인 아키텍처 시스템’을 만들며 반복 작업을 규칙으로 고정했던 것도, 실은 이 태도에서 출발한 셈이다.

극적인 변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방법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내 인생이 극적으로 뒤바뀌었다고 과장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도 내 안에는 관성에 이끌린 비생산적인 무의식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고,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냥 흘려보내는 순간도 많다.

다만 나는,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방향만이라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바뀌어야지" 하고 의식하는 것보다, 하루에 다섯 번 알아차리는 편이 낫다고 —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축적이 변화를 만든다면, 축적의 횟수를 늘리는 쪽이 더 나은 방향일 테니까.

책을 덮고 나면 또 관성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때 한 번 더 꿈틀대는 것.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건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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